➃ 미법 산수화풍
중국 북송 때의 문인화가인 미불, 미우인 부자가 창시한 화풍. 점을 여러 번 겹쳐 찍어서 형태를 표현하는 미점준을 사용하여 부드러운 곡선의 흙산이나 멀어 보이는 나무 등을 그린다. 특히 비온 뒤나 짙은 안개가 낀 습윤한 자연경관을 그릴 때 즐겨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예술이 발전한 시기였고, 특히 회화와 백자를 비롯한 도자기에서 그 성격이 두드러진다. 결론적으로 조선왕조시대의 예술은 결국 회화와 백자를 비롯한 도자기에서 더욱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는데 회화는 현대인들이 말하는 순수미술, 백자는 공예인 생활예술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으며, 과거를
회화권에 있어 중국의 전통회화는 중국화로, 일본의 전통회화는 일본화로 불렸으나 일제는 한국 고유의 전통과 민족성의 자각을 꺼려 1921년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와 22년의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한국의 전통회화가 조선화로 지칭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고 대신 동양화로 부르게 하였다.
한국화는
예술관을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창작의 주체였던 사대부 예술관의 특징 중 하나로 수양론적 측면을 들 수 있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예술작품의 격과 제작자의 인격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예술은 창작 주체의 인격임과 동시에 그들이 몸담은 집단의 보편적 가치,곧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
Ⅰ. 개요
조선후기(약 1700년 이후)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다양한 변화들 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 회화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은 사상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변화였다. 조선 성리학과 실학의 발달은 주체적인 자존의식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고가 크게 중시되
Ⅰ. 동양의 도가
노자(老子)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연대의식이 피어나는 자연사회를 이상사회로 생각하였다. 자연사회의 중요한 조건은 신분계급이 철폐되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신분계급의 철폐는 단순한 제도의 폐지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문제였다. 그리하여 그의 자연사회는 물질적으로 또
2. 조선의 미술
조선은 고려를 계승하여 사회적으로 퇴폐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사상적 발판으로 삼으면서 숭문천기사상(崇文賤伎思想)이 예술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소박하고 겸손하며 청결한 서민적인 미술이 성하였다.
회화 부분에서 보면 태조때 도화서가 설치
미술 양식은 단순히 서양 미술사 한 시대의 미술 양식 이상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은 교회 건축을 포함하여 일반 공공건물도 포함하는데, 교회 건축에서 시작된 조각과 회화는 주로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중세와는 달리 인간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이제 예수나 마리아의
Ⅰ. 서론
산수화에는 `한`의 사상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진리관이 깃들어 있다. 고래로 한인들은 사물의 진리를 판단함에 있어 그 근본 중심을 부이성에 둔다. 이것은 한국인의 대물관에서 오는 시방식의 특성이다. 우리가 보는 산수는 주관 쪽에서 객관적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연의 일
논리적 ·사실적인 표현을 정통으로 하며, 숭고 ·풍만 등 정신의 충실을 제일의로 하였다. 또 비애 ·통곡 등 격정의 표출을 이단으로 보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역대 왕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중국미술의 본질이며, 이민족의 침입에 의한 지배 하에서도 변화나 동요가 없었다.